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르친스크 조약 (문단 편집) == 배경 ==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독립해 확장을 시작한 러시아는 모피무역에 주목했다. 마침 [[시베리아]]는 모피가 풍부한 곳으로 [[이반 4세]]의 [[타타르]] 축출 이후 무주공산이었다. 러시아 정부는 [[카자크]]들을 고용해 동쪽으로 파병했고, 이들이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시베리아 개척]]의 아버지들이었다. 결국 [[청나라]]의 영토인 아무르 강 일대까지 진출한다. 러시아의 군사력을 두려워한 청나라는 [[조선]] 정부에 원군을 요구했는데 이것이 [[나선정벌]]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중국과 교역관계를 재개하는 것이 훨씬 이득으로 판단됐다. 혼란스런 국내사정[* 당시 러시아는 이복누이 소피아가 반란을 일으켜 어린 [[표트르 1세]]를 압박해, [[이반 5세]]가 공동 황제가 되고 소피아가 섭정이 되도록 만든 상태였고, [[나선정벌]]의 복수도 소피아가 막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네르친스크 조약 역시 소피아가 체결했다]이 겹쳐 러시아는 만주로의 영토 확장을 포기하고 대신 러시아의 상업 활동 허가와 국경 확정에 합의, 1689년 조약을 맺고 아무르강 이북 지역[* 우다강 주변은 미결정지] 및 [[외몽골]] 일부 지역에 대한 국경을 확정했다. 이것이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1687년 [[8월]] 러시아의 전권 대사 골로빈은 셀렌긴스키(바이칼 호 근처. 현 부랴트 공화국)에 도착해 강희제에게 서신을 보낸다. 러시아는 셀렌긴스키에서 회담을 갖고 싶었지만 갈단 체렝([[준가르 칸국|준가르 부]])을 걱정한 청나라는 거부했고, 결국 네르친스크에서 협상이 진행되었다. 1689년 [[6월]], 청 협상 대표단 [[허서리 송고투]][* 허서리 송고투는 강희제 치세초기 보정대신이었던 [[허서리 소닌]]의 아들이었고 자연스레 소닌의 권력을 물려받았으며, 황태자 윤잉이 형의 외손주였기에 황태자당의 영수가 되었다. 이후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황장자인 윤제를 중심으로 뭉친 황장자당의 [[나라 밍주]]와 대결구도를 형성했다. 송고투는 이후 황태자 윤잉의 비행과 모반 혐의로 인해 처형당하지만, 밍주는 권력을 빼앗기면서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는 골로빈에게 도착했음을 알리고 [[8월 19일]], 회담에서 지켜야 할 사항을 골로빈과 정하기 시작한다. 이후 송고투와 골로빈은 냉병기로 간단히 무장한 채 회담장을 호위하고 있는 경호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등 잡담을 잠시 나눈 뒤 회담을 시작했다. 당시 골로빈의 사절은 천여 명이었으나 송고투는 예수회 [[선교사]] 출신 [[통역사]], 만여 명의 [[승려]] 및 군사 등 엄청나게 많은 사절을 데리고 왔다. 회담 초기에는 양측의 군사적 충돌에 청나라가 [[레나 강]]을 국경으로 정할 것을 요구하여 양국의 국경에 대한 신경전이 벌어져 회담장에 긴장감이 맴돌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풀어졌고 이내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해서 맺은 조약이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조약으로 청은 헤이룽강 북안을 확보했고 러시아는 북경과의 교역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나름 윈윈. 이후 당시 청나라 영토였던 [[외몽골]]과 러시아령 시베리아에서의 국경 확정을 위해 [[1727년]] [[캬흐타 조약]]을 추가로 맺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